넷플릭스 추천 영화 <남산의 부장들> 후기, 10.26사태 실화영화


주연-배우-이병헌의-사진
남산의 부장들

1979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실제 사건 10.26 사태를 최초로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연기한 배우 이성민의 분장한 모습이 실제 박정희 대통령과 매우 흡사해 많은 사람들의 충격을 자아냈습니다. 오늘은 영화 리뷰와 함께 약 18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권을 잡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실제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전대미문의 사건 발생

1969년 대통령의 연임을 위해 개헌이 필요했다. 개헌을 통과시켜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준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이다. 박용각은 대통령을 믿고 온갖 더러운 일까지 처리하였으나 대통령에게 토사구팽 당한다.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하기 40일 전, 박용각은 한국 정부 로비와 관련해 미국에서 열리는 청문회에 참석해 대통령에 관한 부정부패, 비리 등을 폭로한다. 심지어 박용각은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을 회고록까지 작성 중이었다. 한편 이러한 소식으로 발칵 뒤집힌 청와대. 현 중앙정보부장이자 박용각의 동료인 김규평은 당장 미국으로 향해 박용각을 만나 설득 끝에 회고록을 회수한다. 덕분에 대통령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게 되지만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대통령 경호실장 곽상천이 청와대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미국이 설치한 도청기를 발견한다. 설상가상으로 김규평이 회수했던 회고록이 일본에서 출간되어 대통령의 치부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김규평은 입지가 흔들리게 되고 곽 실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김규평은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박용각을 제거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실행한다. 작전 성공을 대통령에 알렸으나 대통령의 냉대는 더욱 심해졌고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 버린 김규평. 그제야 대통령의 실체를 깨닫게 된 김규평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엇나가기 시작한다. 대통령의 명령에 대놓고 반기를 들고 갈등이 깊어지게 된다. 결국 김규평은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10월 26일 거사를 실행한다.

President PARK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김종필과 함께 5.16 군사 정변을 통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수립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그 후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67년 6대, 1971년 7대, 1972년 8대, 1978년 9대 대통령까지 연임했다. 9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임기 중에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와의 갈등으로 인해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통령 재임기간은 총 15년 10개월이다. 그러나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시기까지 포함하면 대략 18년 동안 대한민국의 수장 역할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은 임기 4년, 최대 두 번까지 연임가능한 중임제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5대, 6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자신의 재임을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해 개헌까지 하며 3선에 성공한다.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다른 후보들과 압도적 차이를 보이며 당선되었던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만 개헌 시점부터 국민들의 민심을 잃었으며 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과 접전 끝에 근소한 차이로 겨우 당선된다. 더 이상 합법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없었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며 독재자가 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시기를 이미 겪었기 때문에 독재에 대한 반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고 유신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이러한 반감을 우려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하기 전에 국민들의 반감을 달래줄 방법으로 통일이라는 수단을 내세웠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통해 국민들에게 통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6.25 전쟁 후 분단된 후 계속해서 통일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던 국민들은 통일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보여주기 식에 불과했다. 국민들이 잠시 잠잠해진 새에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을 대한민국의 절대권력으로 만들었다. 유신 헌법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여 종신집권 가능하게 했다. 또한 직선제를 폐지하고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선거 투표자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하수인들이었다. 또 국회 해산권과 긴급조치권 등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극대화시켜 절대권력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로 인해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 투쟁이 이어졌다.

1979년 10.26사태 발생

이 시기 1,2차 석유 파동을 겪으며 경제적인 문제의 발생과 함께 미국과의 균열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의 입지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때문에 정권의 2인자였던 김재규는 불안함을 느끼고 박정희 대통령을 잘 설득해보려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고집불통이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무너지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YH무역 사건과 부산, 마산 민주항쟁이다. 부산, 마산 민주항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지도부들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을 맡길 수 없다고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이 진행되던 중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되며 박정희 대통령은 사망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초이자 유일하게 재임 기간 중 사망한 대통령이고 최초이자 유일하게 암살당한 대통령이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의 운명은 이미 자기 스스로 정해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신을 통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대통령 연임 제한도 스스로 폐지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대통령직을 포기하거나 죽어야만 그만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임기 초기부터 경제를 우선으로 생각했던 대통령이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루어냈다. 또한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18년 동안 한 국가의 원수로써 무수히도 많은 성과와 과오를 범했지만 이 또한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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