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 굴욕, 영화 <남한산성> 줄거리 및 리뷰 / 치욕스럽지만 기억해야할 역사


영화에-출연한-배우들-사진
남한산성

조선의 16대 왕 인조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의 입장을 두고 혼란에 빠졌던 시기입니다. 실리를 챙겨야한다는 주화파와 명분이 먼저라는 주전파 신하들 사이에 인조는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됩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조선 최대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과연 인조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대의와 실리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조선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조선의 16대 왕이 된 인조 시기.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틈을 타 여진족은 지도자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으로 통합되었고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가 청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청나라는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하게 된다. 당시 명나라를 섬기고 있던 조선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고 결국 이를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한다. 청나라 대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까지 도망치게 된 상황, 대의를 지키기 위해 청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김상헌'과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최명길' 사이에서 인조는 고민은 깊어지게 된다.

병자호란 시대적 배경과 삼전도의 굴욕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약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은 궁궐이 불타고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원군 요청으로 조선을 지원해준 명나라 또한 전쟁으로 피해가 막심했다. 광해군 시기, 이러한 혼란 속에서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합해 1616년 후금을 건국하고 만주지방을 지배하며 힘을 키운다. 명나라와 후금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사이, 조선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조선 건국 무렵부터 명나라와 사대교린 관계를 유지하며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은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후금이 두려워진 것이다. 이러던 와중에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조선의 16대 왕으로 즉위한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은 명나라를 섬기고 오랑캐를 배척해야 한다는 친명배금 정책을 강력히 주장했다. 친명배금 정책을 못마땅해하고 있던 당시 후금의 지도자 홍타이지는 '모문룡 가도 사건'을 계기로 1627년 조선을 침략한다. 이 사건이 정묘호란이다. 의병과 관군이 합심하여 후금군에 대항하였으나 열세에 놓이게 되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 가는 상황까지 놓이게 된다. 후금에게 점령당한 조선은 결국 한 달 만에 후금과 형제국 관계를 맺는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이 끝나게 된다. 이후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국력을 키운 홍타이지는 1636년 청나라를 건국하며 황제가 되려 한다. 반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나라는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자신을 황제로 섬길 것을 원하며 청나라와 조선의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이를 조선이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하겠다 선포한다. 이에 허겁지겁 전쟁을 준비하던 조선, 그러나 전쟁은 결코 안된다고 주장한 주화론자 최명길의 만류로 인조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오랑캐에게 더 이상 휘둘릴 수 없으니 전쟁을 하자고 주장하는 주전론자 윤집과 최명길 그리고 삼학사의 강력한 반발로 사신을 보내는 일정이 계속해서 미루어지게 된다. 한참 후에야 사신이 파견되지만 이미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진군하기 시작했고 결국 청나라 군대 45000명이 조선을 침략한다. 이 사건이 병자호란이다. 청군은 엄청난 속도로 진군하여 수도로 향했고 이 소식을 전한 인조는 정묘호란 때처럼 허겁지겁 강화도로 피난 가려했으나 청군의 선발대에 의해 길이 막히게 되어 결국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남한산성에서 초반 며칠 동안 조선군은 청군에게 피해를 입히며 항전하였으나 한정된 식량과 추운 날씨에 패색이 짙어갔다.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싸울 의지를 잃어갔고 강화도로 피난 갔던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인질로 잡히고 최후 거점인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인조는 결국 항복하게 된다. 인조는 청나라 홍타이지를 황제로 모시겠다는 삼궤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삼전도에 치르게 된다. 이 사건이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개국 이래 지속되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롭게 청과 군신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뛰어난 작품성 그러나 흥행은 실패

영화 남한산성은 개봉 이틀 만에 100만 관객을 달성하며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이 성과는 이전에 개봉했던 영화 '관상', '광해, 왕이 된 남자', '사도' 보다도 빠른 기록이었다. 그러나 영화 남한산성은 최종 누적관객수 약 390만 명을 달성하며 손익분기점 돌파에 실패했다. 작품성이 우수하다는 평가에 비해 흥행에는 실패한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스스럼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고 생각한다. 영화 남한산성은 러닝타임 동안 내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하며 암울했던 과거를 가감 없이 그대로 표현했다. 또한 140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전쟁 장면이나 자극적인 요소 없이 대화가 주를 이루어 당시 상황의 갈등을 표현해 낸다. 이러한 요소들이 관객들의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반대의 예로 영화 '명량'을 보면, 역사 고증의 오류와 영화 내용의 신파적인 요소로 인해 관객들의 평가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대 흥행 1위 기록을 세웠다.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 역사를 영화화해 흥행에 대성공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나라의 운명을 구한 영웅으로 잘 표현했고 특히 왜군과의 해상전투 장면은 관객들이 몰입하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현실에 대한 명확한 고증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보다 흥행에 필요한 것은 국민들에게 애국심이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 남한산성은 우리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었고 기존 영화들이 흥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넣은 것에 반해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선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치욕적인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특히 영화 남한산성은 그러한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니 꼭 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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