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영화 <인천상륙작전> 정보 리뷰, 실화바탕 왓챠 추천


주인공들의-비장한-모습
인천상륙작전

오늘 알아볼 작품은 1950년 6.25 전쟁 당시 수세에 몰린 남한을 위기에서 구한 인천 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인천 상륙작전'입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역에 영화 테이큰으로 유명한 배우 리암 니슨이 캐스팅되며 큰 화제가 됐던 작품입니다. 영화의 전반적인 정보 소개와 함께 실제 6.25 전쟁 당시 상황을 소개해보겠습니다.

5000:1의 확률을 뚫고 성공한 전략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선전포고도 없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이 불법적인 기습 남침을 시작한다. 탱크로 무장한 북한군의 진격에 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국군은 한 달여만에 최후 전선인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UN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공 확률 5000:1이라는 무모한 작전을 계획한다. 이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선 남해와 서해를 돌아 인천으로 향하는 길을 무조건 확보해야만 했다. 작전 중에 북한군이 계획을 눈치채고 공격을 개시하면 연합군은 갯벌에 갇혀 모든 군함과 군인들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 이러한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2시간 동안 적을 교란하기 위한 또 다른 작전이 필요했다. 첩보작전 'X-ray'는 대위 장학수를 필두로 8명의 해군으로 이루어진 첩보부대에 의해 실행된다. 그들의 임무는 바다에 떠있는 기뢰의 위치를 파악하고 제거해 연합군이 무사히 인천에 상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학수는 작전 수행 도중 북한군 사령관 림계진의 의심을 사게 되고 결국 정체를 들켜 쫓기게 된다. 겨우 도망친 장학수 대위는 기뢰 현황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고 기뢰 현황을 파악한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에 실제 'X-ray'작전에 투입되어 전장에서 목숨 바쳐 싸우다 순국한 부대원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6.25 전쟁 당시 상황

일반적으로 우리가 6.25 전쟁이라고 칭하는 이 전쟁의 공식 명칭은 '한국전쟁'이며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미국의 애치슨 선언이다. 당시 남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1년 뒤인 1949년 6월 30일부로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게 된다. 미군의 철수와 더불어 1950년 1월에 한반도를 미국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전부터 남한을 사회 주의화시켜 적화 통일하고자 했던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를 받아 기습 남침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전쟁이 시작됐다. 이틀 뒤인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에 따라 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남한을 지원할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북한의 기습적인 침투에 무방비로 노출된 남한은 수도인 서울은 3일 만에 정복당한다.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한 UN군이 남한에 도착한 것은 7월 7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은 북한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UN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북한군에 의해 부산까지 점령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UN군의 참전에도 북한의 진격을 멈출 줄 몰랐고 결국 한미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결전을 전개한다. 미군의 공군 전력과 함께 UN연합군의 화력지원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시행한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승기를 잡은 UN군은 거침없이 북쪽으로 진격해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통과해 평양을 탈환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10월 말 국경지대인 압록강변에 도달해 전쟁의 끝이 보이던 그때, 중공군 28만 명이 참전하게 되며 전세가 요동치게 된다. 연합군은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1.4 후퇴를 겪으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적군에게 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된다. 1951년 6월 소련의 휴전 제안으로 휴전 회담이 시작됐다. 그러나 휴전 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2년 동안 38선 근처에서 고지전이 전개되며 또다시 셀 수 없는 희생자를 만들었다.

6.25 전쟁 이후 상황

휴전 협정이 2년이란 긴 시간이 소요된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과 중국은 공산주의를 유엔과 미국은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북한과 중국은 포로들을 강제로 다시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요청했으나 유엔과 미국은 포로들의 자유의사 결정에 따라 송환하길 바란 것이다. 게다가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국민들은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할 목적으로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가 미국에 의해 처형될 뻔한다. 북한의 재침입을 우려한 이승만이 주한 미군 주둔과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는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할 것을 보장받은 후에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3년간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지만 한반도는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미망인, 전쟁고아는 물론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50년 전쟁 발발 이후 72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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