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윤동주 실화 영화 <동주> 리뷰 그리고 이준익 감독의 진심


주인공들이-미소짓고-있다
동주 포스터

영화 '동주'는 초저예산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을 인정받아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작품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영화에 담고 싶었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또 누구보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갈망했던 시인 윤동주에 대해서도 소개해보겠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독립을 향한 열망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형 송몽규 이민자 3세로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글재주가 좋아 잡지를 만들어 시와 산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윤동주의 아버지는 윤동주가 글을 쓰는 문인이 아닌 의사가 되길 바란다. 평소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송몽규는 직접 나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 자금을 모으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윤동주와 송몽규는 계속 글을 쓰고 잡지 만드는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송몽규가 글만으로는 조국독립을 할 수 없다는 식의 의견을 비추면서 윤동주와 대립하는 상황이 생긴다. 일제의 창씨개명을 비롯한 조선인 탄압이 거세져 둘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송몽규는 일본에서도 직접 유학생들을 모아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계획을 세운다. 윤동주는 직접 무장투쟁에 참여하진 않지만 자신만의 신념을 시를 통해 표출한다. 그러나 송몽규의 행각이 발각되면서 둘 모두 체포당하게 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일제에 의해 무슨 내용물이 담겼는지 모를 주사를 지속적으로 맞게 된다. 일제의 가혹한 심문과 지속적인 주사 투약으로 인해 윤동주와 송몽규는 모두 사망하게 된다. 이들이 사망하고 6개월 후 조선은 해방을 맞이한다.

이준익 감독의 진심이 담긴 영화

영화 '동주'의 총제작비는 5억으로 저예산 영화 중에서도 낮은 편이다. 이준익 감독은 민족시인 윤동주라는 인물을 상업적 흥행요소로 이용하고 싶지 않아 했다. 감독은 윤동주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꾸밈없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전 포스팅에서 소개한 '군함도'와는 비교되는 행보라고 볼 수 있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인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 역을 연기한 배우 유아인이 감독의 차기작에서 동주 역을 맡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감독은 이미 유명 배우인 유아인의 명성을 이용해 영화의 본질이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 거절했다. 또한 이준익 감독은 애초에 영화를 상업적으로 소비할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 홍보를 위한 광고도 진행하지 않았다. 그저 배우 강하늘이 몇몇의 TV 프로그램에 나가 작품 소개를 한 것이 홍보의 전부이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흑백 영화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암울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이준익 감독의 의도였다. 감독은 유명한 배우의 출연이나 화려한 연출로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를 원한 게 아니다. 사실적인 역사 고증을 통해 윤동주라는 사람과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삶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적극적인 홍보가 없었던 탓에 개봉 초반 영화는 관객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흥행에 성공했다. 총 관객수 120만으로 많은 관객수는 아니다. 그러나 거의 제작비의 20배에 달하는 90억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매우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포털사이트 평점 기준으로 10점 만점에 9점대를 기록 중이다. 또한 넷플릭스를 비롯한 다른 미디어에서도 9점 이상의 평점을 받으며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화가 개봉한 2016년에 열렸던 대부분의 시상식에서 수상한 이력이 있다. 대표적으로 백상 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대상을 수상했으며 '송몽규'역을 연기한 배우 박정민은 남자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다른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을 수차례 수상했다. '송몽규'역을 연기한 배우 박정민은 이 영화에서 훌륭한 연기력을 선보여 2016년 남자 신인배우상을 싹쓸이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인지도를 높여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선보이는 중이다.

한국인 윤동주

일제강점기 시절, 1930년대를 기점으로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로 변절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졌다. 더불어 오랜 식민지 생활에 지쳐 조국 독립의 의지를 잃기 시작해 결국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친일파 문인으로 서정주, 최남선, 노천명 등이 있다. 그러나 이육사와 함께 윤동주는 민족시인으로 여겨진다. 직접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서진 않았지만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저항시를 통해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그의 생전 행보나 그가 집필한 시를 통해 그의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이 그가 아직까지도 민족시인이자 독립투사로서 인정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조선의 독립을 누구보다 열망했던 윤동주가 중국의 역사왜곡으로 인해 중국인으로 포장되고 있다. 윤동주의 본적은 함경북도이며 중국 국적을 취득한 기록이 없다. 19세기 후반 그의 할아버지가 간도로 이민을 간 탓에 윤동주의 묘는 그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다. 북간도는 현재 중국의 연변 지역이다. 그러나 당시 북간도는 조선 말기부터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지역이다. 해방 이후 만주가 소련군에 점령당하면서 공산화되는 시점에 윤동주의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윤동주의 묘를 남겨둔 채 북간도를 떠나 한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냉전이 완화된 1992년이 되어서야 가족들은 묘소를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 방문 당시 묘소는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상태였다. 다시 생가와 묘소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 포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족이라는 표현은 윤동주 사후에 생겨난 표현이다. 윤동주는 본인이 집필한 여러 시에서도 조선을 고향이라 말하고 있고 만주는 고향이 아닌 타국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윤동주는 단 한 번도 중국어로 글을 쓴 적이 없다. 그의 정체성은 분명한 조선인이다. 그의 조선 독립에 대한 의지는 누구보다 뚜렷했고 확고했다. 중국의 역사왜곡으로 인해 우리 민족을 위해 희생한 민족시인이자 독립투사 윤동주의 국적이 바뀌는 일은 없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복, 김치, 판소리 등과 같은 명백한 우리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억지 피우는 일도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것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대응하지만 다른 서양에서는 실제로 중국 문화로 여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조금 더 공부하고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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