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일제강점기 독립군 영화 실존인물, 친일파 처벌


영화-암살의-주연-배우들-사진
암살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의 실화를 각색한 영화인 암.살을 리뷰해보겠습니다. 이정재, 전지현, 하정우 등 뛰어난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으며 탄탄한 스토리와 영상미로 이목을 끌어 1000만 관객 달성에 성공한 작품입니다. 작품에 대한 간단한 리뷰와 함께 일제강점기 시대별 상황과 해방 이후 친일파의 처벌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친일파 암.살 작전, 치열했던 그날의 기록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인 김구의 신임을 받고 있던 경무국 대장 염석진은 1911년 손탁호텔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친일파 강인국에 의해 작전은 실패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강인국은 총독의 은총을 받아 막대한 부와 권력을 얻게 된다. 강인국의 아내 안성심은 남편과는 다르게 염석진의 독립운동을 몰래 도와주는 조력자였는데 친일파인 강인국에게 이러한 행각을 발각당한다. 강인국은 자신의 앞날에 안성심이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아내를 제거한다. 강인국에게는 쌍둥이 딸 둘이 있었는데 아내를 제거한 후 쌍둥이 중 첫째인 미츠코는 강인국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둘째인 안옥윤은 유모의 도움으로 강인국에게서 도망친다. 한편 작전에 실패하고 도망치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된 염석진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본의 밀정이 되기로 결심한다. 1933년 독립운동 지도자인 김원봉과 김구의 주도하에 염석진을 필두로 또다시 작전을 계획한다. 그리하여 작전에 나설 저격수 3명을 모집하게 되는데 일본군에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안옥윤, 황덕삼, 추상옥'이 그들이었다. 작전을 펼치는 동안 김구는 염석진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염석진을 일본의 밀정이라 생각하게 되고 단원들에게 염석진이 밀정이면 그를 제거할 것을 명령한다. 이미 염탐을 통해 김구가 본인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염석진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빠지자 독립군 동료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달아난다. 한편 이러한 상황을 모르던 독립군 3인방은 경성에서 일본 육군 소장 카와구치 마모루와 매국노 강인국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치밀한 계획으로 작전에 성공하는듯했으나 밀정 염석진이 강인국에게 계획을 모두 알렸고 또다시 강인국의 술수로 결국 작전에 실패한다. 강인국은 염석진에게 독립군의 일원인 안옥윤이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아내를 제거했던 것처럼 안옥윤도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그때 안옥윤과 함께 있던 첫째 딸 미츠코를 안옥윤으로 착각해 강인국은 자신의 손으로 미츠코를 살해하고 만다. 안옥윤은 카와구치 슌스케와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미츠코 행세를 하며 결혼식 당일에 다시 한번 작전을 계획한다. 결혼식 당일 밀정 염석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독립군들의 도움을 받아 안옥윤은 결국 카와구치 마모루, 강인국, 카와구치 슌스케를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1949년 경찰 고위 간부가 된 매국노 염석진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자신은 일본의 밀정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였다며 재판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모독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된다. 재판장을 나온 염석진은 거리에서 우연히 미츠코를 보게 되고 그녀의 뒤를 쫓았으나 그곳에는 미츠코가 아닌 안옥윤과 독립운동 단원들이 있었고 염석진은 결국 안옥윤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일제강점기 시대별 상황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1910년대 일본의 헌병 경찰 무단 통치하에 국내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할 수 없게 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연해주, 중국, 미국 등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간다. 1920년대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일본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 체제로 전환된다. 이 시기에 생계형 친일파가 아닌 진심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많은 친일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기점으로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활동이 이루어졌고 더불어 의열단이나 애국단과 같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일어난다. 1930년대 이후로 일본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한글 이름 대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하는 창씨개명이 이루어졌고 한글과 대한민국 역사 교육을 금지시켰다. 또한 '초등학교'라는 명칭 이전에 사용된 '국민학교'라는 명칭도 이 시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황국신민 학교'의 준말이라는 설도 있고 근거가 부족하다는 설도 있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일본군 병사들의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에서 대량의 쌀을 수탈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아주 소량의 잡곡만을 배급했다. 또 쇠 그릇, 숟가락 등 쇠붙이들을 모조리 수거해 일본군 전쟁 물자에 동원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남성들은 군함도 같은 탄광촌에 강제 징용되고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병되어 전쟁에 목숨을 잃었다. 여성들은 위안부에 끌려가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대한민국 해방과 친일파 처벌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한다. 그리고 3년 뒤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매국노와 친일파들의 처벌을 위해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꾸린다. 하지만 미군정이 공산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친일파를 이용했고 이승만 정부와 '한국 민주당' 또한 미군정을 지지했기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기에 국회의원들 중 '국회 프락치 사건'과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겪으면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결국 와해된다.기록에 따르면 총 682건의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실형이 선고된 것은 고작 7명뿐이고 그마저도 모두 재심을 통해 풀려났다.

광복 70주년 개봉 그리고 광복절 1000만 관객 달성

영화 '암.살'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인 2015년에 개봉했다. 또한 매우 신기하게도 8월 15일 광복절에 1000만 관객을 달성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던 일본군과 조국을 버린 친일파를 처단하는 독립군 소재의 영화 암살이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개봉했고 8월 15일 광복절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도 광복절에 영화 암살이 1000만 관객 기록을 달성하길 바랐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이와 관련한 다수의 매체에서 기사들이 쓰이고 축하가 전해졌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