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플레이 추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줄거리 및 후기. 광해군 업적


광해군이-의자에-앉아있는-모습
광해, 왕이 된 남자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을 소재로 픽션을 가미해서 관객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모두 선사한 영화 '광해'입니다. 1000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인만큼 오늘은 영화의 자세한 내용보다는 실제 광해군이 어떤 임금이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지워진 15일간의 기록 그리고 두 명의 왕

광해군은 즉위 후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반대세력에 끊임없이 견제당하고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다. 두려움을 느낀 광해군은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위험을 감수할 대역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허균은 어느 기방에서 만담꾼으로 활동하는 '하선'을 발견한다. 허균은 광해군과 닮은 외모는 물론 금세 타인을 따라 하는 재주와 말솜씨로 왕의 흉내도 완벽하게 내는 '하선'을 끌고 궁으로 향한다. 광해군은 하선에게 자신의 흉내를 내보라 하였고 하선이 자신을 완벽히 따라 하는 것을 보고 하선에게 자신의 대역을 맡긴다. 그러던 어느 날 광해군이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게 된다. 허균은 아무도 모르게 광해군을 궁 밖으로 피신시켜 치료를 받게 하고 하선이 광해군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다. 처음에는 허균의 지시대로만 행동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점차 하선은 신하들의 부조리함에 맞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며 진짜 왕다운 면모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하선을 보며 허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광해군의 의식이 돌아왔고 허균에게 자신의 의식이 없었던 15일간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하선을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잠시나마 하선에게서 진정한 왕의 모습을 본 허균은 차마 하선을 죽일 수 없었고 결국 하선이 탈출하게 도와준다. 하선은 허겁지겁 도망쳐 배를 탔고 뒤를 돌아본 순간 그곳에는 허균이 서 있었다. 허균은 떠나는 하선을 바라보며 존경의 마음을 담아 고개 숙여 인사했고 그를 본 하선은 눈물을 흘린다.

왕보다 위대한 세자

광해군은 조선 14대 왕 선조의 서자이다. 선조의 정실부인이었던 의인왕후 박씨는 건강 문제로 자녀를 낳지 못했다. 후궁 공빈 김씨는 두 명의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첫째가 임해군이고 둘째가 바로 광해군이다. 선조 재위 시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는데 국난의 상황에서 선조는 국왕으로서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다. 선조는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쳤으며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을 파직시켰다. 그 결과 왜군이 바다를 장악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이 위험에 빠졌다.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칠 생각까지 했기에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조선 조정의 실권을 떠넘기듯 넘겼다. 이로써 광해군은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세자가 된다. 광해군은 전란 상황에서 백성들을 보살피고 병사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기도 하며 선조를 대신하여 왕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그 결과 선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광해군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선조는 인목왕후를 새로운 정실부인으로 삼고 아들을 출산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왕의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신하들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선조는 자신의 불안정한 지위 탓에 끊임없이 광해군을 견제했고 임종 직전이 되어서야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러한 결정에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신하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인목왕후가 광해군을 왕으로 인정함으로써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왕에 즉위하게 된다.

광해군의 업적

광해군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했다.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는 양전 사업과 호구조사를 실행했고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했다. 기존에 네 곳에 나누어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을 다섯 곳으로 분산시켜 보관하도록 하여 후에 전쟁이 다시 발생하더라도 소실의 위험을 줄였다. 영화 내에서 광해군의 업적이 크게 두 가지 나온다. 첫 번째가 대동법 시행이고 두 번째가 명나라 파병 사건이다. 1608년 광해군은 즉위 직후 대동법을 실시한다. 세금으로 지역의 토산물은 징수하던 기존의 방식에 너무 많은 폐단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겪자 토산물 대신 쌀, 옷감, 동전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한 것이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조세를 돈으로 지급 가능하게 한 조세 금납화의 시발점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했고 조선의 전쟁을 지원해줬던 명나라도 피해가 막심했다. 반면 그 시기에 여진족은 지도자 누르하치에 의해 통합되어 세력을 키우고 더욱 강성해져 후금국을 건국한다. 후금국과 명나라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 파병을 요청한다. 명나라를 섬기던 신하들은 당연히 파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막강해진 후금국의 후환이 두려웠다. 또한 왕으로서 무고한 백성들의 사지로 내보낼 수 없었다. 광해군이 내린 결정은 명나라와 후금국에게 모두 미움받지 않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2만의 병사를 파병해서 명나라에 예를 갖추고 후금국에게는 따로 서신을 보내 조선은 후금국과 싸울 마음이 없으니 백성들을 무사히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한 것이다. 영화에서 파병 문제를 두고 광해군과 신하들이 대립하는 장면은 단연코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 중 하나이다. 광해군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의 연기가 매우 돋보이는 장면이고 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광해군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광해는 왜 광해군이 되었나

조선시대 왕의 호칭은 '조', '종', '군'이 사용되었는데 '군'의 호칭은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반정으로 폐위된 왕들이 왕으로 인정받지 못해 왕자 시절 호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도 많았지만 그만큼 반대세력도 많았다. 광해군은 명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임을 잃었고 이를 계기로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이 명나라의 지원을 받게 된다. 광해는 즉위 후 결국 자신의 형인 임해군을 제거한다. 또한 서자 출신인 광해는 적장자 신분인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성장할수록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꼈다.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광해는 인목왕후를 폐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제거한다.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광해는 폐위당하고 광해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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