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전쟁 실화영화 <봉오동 전투>리뷰 및 평가, 1920년대 무장투쟁사


배우들의-단체-사진
봉오동 전투 포스터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시대인 1920년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만주 지방에서 일본군에 저항했던 독립군의 치열한 사투 '봉오동전투'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전투를 박진감 있게 표현해 관객들에게 쾌감을 선사한 작품입니다. 오늘은 1920년대 우리 민족이 일제에 맞서 어떻게 저항했는지 알아보고 영화 봉오동전투는 관객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도 알아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1920년대 무장투쟁

일제강점기 시기 1920년대는 문화 통치 시기로 1910년대 무단 통치 시기에 비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1919년 3.1 운동 이후로 1926년 6.10 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 또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과 김구가 만든 애국단이 일본의 주요 기관이나 주요 인물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이후 중국의 도움으로 무관학교에 학생들을 입학시켜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도 독립군들의 무장 투쟁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만주 지역 독립군들은 3.1 만세 운동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것에 자극받아 더 강력히 일제에 맞서기로 한 것이다. 한편 일제는 독립군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중국 영토인 만주 지역까지 넘어가 독립군 토벌 작전을 펼친다. 1920년 6월 4일 삼둔자 지역에서 일본군 와 전투가 벌어지고 독립군이 승리한다. 이에 자극받은 일제가 병력을 대거 투입하여 다시 만주 지역 토벌에 나서게 된다. 이때 홍범도 장군이 나서게 된다. 홍범도 장군을 필두로 최진동 장군, 안무 장군이 이끌던 독립군 단체 '대한북로독군부'도 이에 맞서 항전 준비를 한다. 화력적으로 열세했던 독립군은 전면전을 펼치는 대신 지형을 이용해 매복 작전을 펼친다. 홍범도 장군의 지휘 하에 일본군이 반격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제압에 성공하였고 일본군은 패퇴한다. 이후 일제는 복수의 기회를 노렸지만 뚜렷한 명분이 없자 1920년 10월 고의로 훈춘 사건을 일으킨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이 훈춘 시가지를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을 불태우게 한다. 이로써 명분이 생긴 일제는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파견하여 다시 한번 대규모 독립군 소탕 작전을 벌인다. 이에 맞서 우리 독립군도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전투가 바로 청산리 대첩이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만주 지역에서 10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한 전투이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우월한 기동력과 화력으로 독립군을 만주 지역에서 몰아낸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고 자유시 참변과 같은 악재가 겹치면서 투쟁 의지를 상실해갔다. 일본군이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만주 지역에 머무르던 조선인 민간인까지 대학살 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건을 '간도 참변',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이때 희생된 민간의 수는 약 3000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 대한 아쉬운 평가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군에 맞서 승리한 전투라는 소재 자체로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충분하나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의 영화에 대한 평들은 아쉬운 편이다. 일단 봉오동 전투에서 가장 핵심 인물인 홍범도 장군의 비중이 영화 내에서 너무 적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리즈물로 제작될 수도 있을 '청산리 대첩'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긴 했다. 하지만 봉오동전투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홍범도 장군이기에 홍범도 장군의 분량이 적다는 점이 아쉽다는 평이 많다. 아마도 감독의 의도는 봉오동 전투에는 홍범도 장군뿐만 아니라 다른 독립군들의 활약도 있었기에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한 일본군이 사용하는 무기라든지 의상 등에도 오류가 발견되기도 했다. 일본군과의 전투 장면도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과장되어 표현되었고 사실적이지 못하다는 평이 많다. 영화 자체는 기획부터 시나리오 작업까지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영화 '봉오동 전투'의 원신연 감독은 일제강점기 시기 패배의 역사가 아니라 저항의 역사과 통쾌한 승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에서 독립군의 저항 정신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좀 더 과장되게 표현한 것 같다. 하지만 관객들의 흥미를 위해 영화적인 요소가 가미될 순 있으나 역사적인 사실을 영화화 한 작품인 만큼 더 철저한 고증과 사실적인 묘사가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이전에 리뷰했던 영화 '고지전'의 경우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아 관중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차라리 영화 '명량'처럼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과장되어 표현하더라도 인물에 중심을 맞추고 풀어나갔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사실 그 당시의 기록들을 찾아봐도 자료들마다 군대의 규모나 사상자 수 등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전투의 진행과정이나 약간의 디테일만 더해졌다면 좀 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됐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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